책은 정보 상품으로는 약해졌지만, 경험의 중심물로는 다시 강해지고 있다. 서울국제도서전과 텍스트힙 현상은 출판 비즈니스가 ‘책 판매’에서 ‘책을 둘러싼 세계의 설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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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오프라인 경험 상품이 되는가

책을 안 읽는 시대라고 한다.

성인 독서율은 계속 낮아지고, 종이책을 읽는 사람도 줄어든다. 사람들은 긴 글보다 짧은 영상에 익숙해졌고, 궁금한 것은 검색하거나 AI에게 묻는다. 책은 더 이상 정보를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2026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린 코엑스에는 개막 전부터 긴 줄이 생겼다. 평일 오전인데도 관람객이 몰렸고, 2030 세대가 눈에 띄었다. 좋아하는 출판사 부스에 가기 위해 뛰는 사람들, 한정판 굿즈를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사람들, 작가 사인회를 기다리는 사람들, 책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자신의 취향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였다.

책을 안 읽는 시대라는데, 사람들은 왜 도서전에 줄을 섰을까.

줄 서는 독자들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의 흥행을 단순히 “책이 다시 인기다”라고 읽으면 조금 아쉽다.

물론 도서전은 책의 행사다. 하지만 이번 현장에서 사람들이 소비한 것은 책 한 권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책을 둘러싼 분위기, 사람, 굿즈, 작가와의 만남, 출판사의 세계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취향의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장면까지 함께 소비했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2025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 성인 종합독서율은 38.5%까지 내려갔다. 종이책 기준으로 보면 숫자는 더 낮아진다. 그런데 젊은 독자들의 움직임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관련 조사와 보도에서는 20대 독서율이 성인 평균보다 높게 나타났고, 도서전 현장에서도 젊은 독자들의 밀도가 강하게 보도됐다.

전체 시장이 커지는 것과 특정 경험에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다른 현상이다.

출판 시장 전체를 보면 어렵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은 더 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취향은 더 이상 조용히 혼자 읽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책은 이제 밖으로 나온다. 줄을 세우고, 사진을 만들고, 굿즈가 되고, 모임이 되고, 방문할 이유가 된다.

그래서 이 현상의 핵심은 “책이 다시 팔린다”가 아니다.

책이 다시 경험의 중심에 서고 있다는 것이다.

텍스트힙의 감각

텍스트힙은 단순히 책 읽기가 멋있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그 안에는 조금 더 복잡한 감각이 있다. 빠르게 넘겨보는 숏폼과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피드 속에서, 책은 오히려 느린 물건이 된다. 즉시 소비되지 않고, 오래 들고 다닐 수 있고, 표지와 문장과 물성이 남는다.

젊은 세대에게 책은 정보 저장 매체만이 아니다.

책은 내가 어떤 문장을 좋아하는지, 어떤 작가를 읽는지, 어떤 표지를 소장하고 싶은지, 어떤 세계관에 끌리는지를 보여주는 취향의 물건이 된다. 읽는 행위만큼이나 고르는 행위, 사는 행위, 들고 다니는 행위, 기록하는 행위가 중요해진다.

여기서 종이책의 의미가 달라진다.

전자책이 편리하고, AI가 빠르고, 요약 콘텐츠가 효율적이라면, 종이책은 효율로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종이책은 효율과 다른 게임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물성, 소장, 발견, 만남, 취향 표현의 게임이다.

종이책의 경쟁자는 전자책만이 아니다.

더 본질적인 경쟁자는 경험 없는 콘텐츠다.

그저 읽고 지나가는 콘텐츠, 검색하고 잊히는 정보, 저장되지 않는 피드와 비교할 때 책은 다르게 작동한다. 잘 설계된 책 경험은 사람에게 “내가 이 세계에 들어왔다”는 감각을 준다.

그 감각이 텍스트힙의 힘이다.

굿즈와 한정판

이번 도서전에서 눈에 띄는 장면 중 하나는 굿즈다.

인기 출판사 부스에는 책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키링, 북마크, 티셔츠, 리커버 도서, 캡슐 굿즈, 한정판 상품이 있었다. 어떤 부스에서는 책을 고르는 줄만큼이나 굿즈와 한정 상품을 기다리는 줄이 눈에 띄었다.

이 장면을 가볍게 보면 “책 행사에 굿즈가 많아졌다” 정도로 끝난다.

하지만 비즈니스모델 관점에서는 더 큰 변화다.

굿즈는 부가 상품이 아니다. 굿즈는 책을 경험하는 방식을 바꾼다. 책의 문장과 표지와 세계관을 일상 속 물건으로 옮긴다. 독자는 책을 읽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책과 연결된 감각을 소유한다.

이때 출판사는 단순히 콘텐츠 생산자가 아니다.

출판사는 취향을 물건으로 번역하는 브랜드가 된다. 작가는 팬덤의 중심이 되고, 책 표지는 디자인 자산이 되며, 문장은 굿즈의 언어가 된다. 한 권의 책은 판매 단위이지만, 하나의 세계관은 반복 접점을 만든다.

이것은 출판업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모든 콘텐츠 비즈니스가 같은 질문을 받는다. 우리는 콘텐츠를 한 번 팔고 끝나는가, 아니면 콘텐츠를 중심으로 반복되는 관계를 만드는가.

도서전의 굿즈 열풍은 작지만 선명한 신호다.

고객은 점점 더 “내용”만 사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를 만질 수 있는 형태로 갖고 싶어 한다.

부스의 진화

부스도 달라졌다.

예전의 도서전 부스는 책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공간에 가까웠다. 많이 보여주고, 할인하고, 구매하게 하는 것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올해 주목받은 부스들은 책을 생활 장면으로 바꾸려 했다.

밀리의서재는 ‘밀리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독서를 집 안의 공간처럼 설계했다. 현관, 주방, 욕실, 거실, 정원 같은 동선을 따라 종이책과 전자책, 오디오, 웹툰, 자체 IP,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협업을 엮었다. 독서를 기능 목록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감각으로 경험하게 만들었다.

교보문고와 교보생명의 ‘티키타카’ 부스도 비슷하다. 피플존, 북존, 메이크존을 통해 책과 사람, 독서 브랜드, 한정 굿즈, 작가 사인회를 묶었다. 책을 단순히 진열하지 않고, 책을 둘러싼 관계와 기억을 설계했다.

이 변화는 중요하다.

오프라인 공간의 역할이 판매 채널에서 경험 장치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매장은 물건을 쌓아두는 곳이 아니다. 박람회 부스도 더 이상 카탈로그를 나눠주는 곳이 아니다. 좋은 오프라인 공간은 고객이 브랜드를 몸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장치다.

도서전은 그 전환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

책을 팔기 위해 공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책이 있는 세계를 경험시키기 위해 공간을 만든다.

책 이후의 사업

출판 비즈니스의 오래된 질문은 “어떤 책을 만들 것인가”였다.

물론 이 질문은 여전히 중요하다. 좋은 책이 없다면 모든 경험 설계는 껍데기가 된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새로운 질문은 이것이다.

이 책은 어떤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가.

이 책은 어떤 취향을 보여줄 수 있는가.

이 책은 어떤 공간을 만들 수 있는가.

이 책은 어떤 굿즈와 이벤트와 커뮤니티로 확장될 수 있는가.

이 책은 고객의 일상 속에서 어떤 장면이 될 수 있는가.

책은 더 이상 혼자 팔리기 어렵다.

하지만 책이 공간, 사람, 굿즈, 이벤트, 취향 표현과 결합하면 다시 강력한 경험 상품이 된다. 출판의 다음 비즈니스모델은 책을 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책을 중심에 두고, 그 주변의 세계를 더 정교하게 설계하는 일이다.

그래서 서울국제도서전의 오픈런은 단순한 흥행 뉴스가 아니다.

그것은 콘텐츠 비즈니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원한다. 다만 이제 이야기는 종이 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공간이 되고, 굿즈가 되고, 만남이 되고, 취향의 신호가 된다.

결국 기업이 던져야 할 질문은 출판사만의 질문이 아니다.

우리의 제품은 기능만 판매하고 있는가, 아니면 고객이 참여하고 싶은 세계를 만들고 있는가.

우리의 오프라인 공간은 판매 채널인가, 브랜드 경험 장치인가.

굿즈와 이벤트는 부가 매출인가, 고객 관계를 깊게 만드는 접점인가.

고객은 우리 제품을 소비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하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우리는 책을 팔고 있는가, 책을 둘러싼 세계를 팔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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